칼럼/정영일(농정연구센터 이사장ㆍ서울대 명예교수)

전례 없는 국민적 지지와 기대 속에 이명박 정부 농정이 출범한지도 어느덧 반년 가까운 시간이 흘렀고 혼란스러웠던 대통령직인수위시절까지 합치면 8개월째로 접어들고 있다.

‘4,800만 국민의 먹거리를 책임지는 성장산업’이라는 비전과 ‘돈버는 농어업, 살맛나는 농어촌’을 목표로 내세운 1기 농정은 천재(天災)라기보다는 인재(人災)의 성격이 짙은 쇠고기 사태의 늪에서 헤어나지 못한 채 조기 퇴진했다. 반년도 안 돼 농정사령탑이 교체되는, 뒷맛이 개운치 못한 기록을 남기게 되었다.

새롭게 출발하는 2기 농정의 과제와 방향에 관해서는 한층 냉정한 성찰과 깊이 있는 통찰력이 요구된다. 우선 제기되는 가장 소박하고도 상식적인 의문은, 임기 5년간 이명박 정부가 추진할 농정의 청사진이 과연 무엇인가 하는 점이다. 왜냐하면 1기 농정에서 그런 것을 볼 수 없었기 때문이다. 3월 18일의 「2008년 업무계획」과 4월의 농업정책국 설명자료 「실용정부 농정 5대 미래전략과제」등 농림수산식품부(이하 농식품부) 정책발표에서 중장기정책의 청사진이라고 할 만한 내용을 찾아보기는 어렵다.

3월의 대통령 업무보고에서는 앞서 인용한 비전과 목표 외에 ①유통법인이 생산자를 이끌어가는 방식, ②농어업과 2ㆍ3차 산업간의 융복합화, ③농어업인에 대한 권한과 책임의 동시부여 등 세 가지 전략과, ①농식품유통혁신, ②핵심인력 양성, ③식품산업 육성, ④규제완화 등 네 가지 실천과제가 제시됐다. 뒤이은 농업정책국의 설명자료에는 위의 실천과제를 시책화한 ①시군단위 유통회사, ②품목별 국가대표조직, ③대규모 농어업회사, ④농어촌뉴타운 조성, ⑤마케팅CEO 양성 등 「5대 미래전략과제」와 노무현 정부의 2004년 「농업ㆍ농촌종합대책」간의 관계에 관해서 “5대 전략과제는 기존 정책과 상충되는 것이 아니라 조화를 이루면서, 제기된 문제점을 개선ㆍ보완ㆍ발전하려는 시도”라고 규정하고, “5대 과제 이외의 과제는 「농업ㆍ농촌종합대책」에 따라 차질 없이 추진”할 것임을 분명히 함으로써 새 정부 농정의 전체 틀에 관한 입장을 정리한 바 있다.

그렇다면 문제의 핵심은, 2004년 「농업ㆍ농촌종합대책」의 틀을 그대로 계승한 채 새 정부 1기 농정에서 기존 정책을 보완하려는 시도로 제시된 「5대 미래전략과제」를 통해 현재 당면하고 앞으로 전망되는 중장기 농정과제에 ‘차질 없이’ 대응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점이다. 불행히도 이 물음에 대한 대답은 부정적이다.

여기서는 먼저 부정적인 대답의 몇 가지 논거를 제시해두고자 한다.

첫째, 2004년 「농업ㆍ농촌종합대책」이 지닌 문제점을 고스란히 이어받는 경우 새 정부 농정의 한계는 너무나 자명하기 때문이다. 특히 농업ㆍ소득ㆍ농촌 등 세 가지 정책을 병렬적으로 설정한 기본틀 가운데서 노무현 정부 말기에 소득정책이 식품정책으로 대체되었지만 극히 부분적인 수정에 그쳤을 뿐 전체 정책틀의 변화까지는 이르지 못함으로써 여전히 소비자 중심의 먹을거리정책(food policy)에서 출발하는 ‘국민농정’의 시각이 결여되어 있다.

또한 경영이양ㆍ쌀소득보전ㆍ논농업ㆍ친환경ㆍ친환경축산ㆍ조건불리ㆍ경관보전 등 다양한 직불제의 나열식 도입확충계획도 문제다. 이는, 농업인들로 하여금 직불제를 단순한 소득이전정책으로 오해할 소지를 키울 뿐 납세자의 사회적 동의를 얻기 위한 상호준수의무(cross compliance)나 WTO허용대상보조기준의 충족 등 직불제 확대의 명분과 논리를 갖춘 전제조건을 결여하고 있다. 정책형성과정도 문제다. 현행 「농업ㆍ농촌종합대책」의 수립은 농림부에 설치된 농정기획단에 의해 폐쇄적으로 이뤄졌고 여론수렴절차도 사실상 요식행위였다는 비난에 직면하면서, 많은 지역에서 지역토론회가 개최되지 못하는 등 농정불신의 대상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둘째, 현행 농정틀에는 중장기정책의 일관성을 확보할 제도적 장치가 결여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투융자계획을 3년 단위로 평가ㆍ조정하여 상황변화에 탄력적으로 대응한다고 규정하고 있지만, 중장기 농정틀을 규정한 법제가 결여된 채 그때그때 행정부의 판단에 따라 정책방향이나 중요시책내용이 바뀔 수밖에 없는 구조 아래서는 정책일관성을 확보할 방도가 없기 때문이다. 미국의 현행 「2008년 농업법」이나 EU의 「2003년 CAP개혁」, 일본의 「1999년 신기본법」등 외국의 경우와 같이 시대가 요구하는 농정개혁의 중요방향과 시책, 필요한 재정조치 등을 입법의 형태로 확정해두지 않는 한 정권이나 농정책임자의 성향에 따라 정책방향이 자의적으로 변동되거나 표류하게 될 가능성을 배제하기 어렵다.

지난해 11월에 국회를 통과한 현행 「농업ㆍ농촌 및 식품산업기본법」은, 당초 대통령자문 농특위가 의결한 「식품ㆍ농업ㆍ농촌기본법」(안)이 정부와 국회심의를 거치는 과정에서 먹을거리정책 전반을 포괄하는 것이 아니라 식품산업육성만을 담는 왜소한 모습으로 변질되어, 식품ㆍ농업ㆍ농촌정책의 균형 있는 추진이라는 현대 선진국 농정에서 공통된 정책틀을 정립하지 못한 채 왜곡되고 말았다. 또한 선언적인 규정에 그치지 않고 실질적인 구속력을 지닌 기본법의 틀을 올바른 내용으로 채우고 새롭게 마련하는 노력은 결코 등한시할 수 없는 최우선의 과제라는 점이 제대로 인식되어야 한다.

셋째, 정부조직개편에 따라 새로 발족한 농식품부는 종래 농림부가 담당하던 업무영역 외에 식품 및 수산분야의 새로운 정책과제들을 관장하게 됐다. 그러나 직제상 식품산업본부와 수산정책실이 신설되었을 뿐 새로운 정책영역과 기존의 농림부 소관 업무영역간의 화학적 결합까지는 이르지 못하고 있다. 신설된 식품산업본부의 구성도, 종래의 식량ㆍ축산ㆍ유통 등 3개국에 최근 식품산업을 관장하는 국단위 조직을 추가함으로써 4개 정책단이라는 이름으로 개편한데 그치고 있다. 수산정책실에 관련해서는 폐지된 해양수산부의 수산행정조직을 단순히 농식품부로 옮겨놓은 상황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그렇다면, 통합된 농식품정책의 관점에서 전면적인 재조정을 통해 1차 산업 전체의 효율을 높이고 먹을거리정책의 통합적 추진을 가능하게 하는 조직개편작업은 이제부터의 과제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농식품부 행정조직과 기능의 전면적 재편성작업은, 외청 형태를 지니고 있는 산림청과 농촌진흥청에 관련해서도 정책기획ㆍ집행ㆍ평가를 포함한 피드백(feedback) 시스템의 개선 차원에서 함께 검토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이와 같은 농식품부 전체 업무영역을 대상으로 한 조직ㆍ기능의 전면적 개편을 거치지 않는 한 정부조직개편의 참된 의미를 살린 체계적 농식품정책의 틀이 새로이 마련되기 어려울 것이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최근 전개되고 있는 지구 규모의 에너지ㆍ환경여건의 구조적 변화에 대응하여 농식품정책의 패러다임 자체에 대한 깊은 성찰과 재검토가 요구되고 있다. 작년 이래 국제 유가ㆍ곡물가격ㆍ각종 원자재가격의 급격한 등귀와 더불어 세계 각국은 과도한 화석연료의존형 경제로부터의 탈피와 지속가능한 신재생에너지 개발에 박차를 가하고 있으며, 농업분야에서도 자원순환형 농업체계의 구축에 대한 정책적 관심이 크게 높아지고 있다.

특히, 사료의 대부분을 수입에 의존하는 가공형 축산과 쌀을 제외한 곡물을 거의 수입에 의존하는 매우 취약한 곡물생산의 기반 위에서 전체 곡물자급률이 30%에도 미치지 못하는 우리 농업의 경우, 국민의 생존기반인 최소한의 식량안보를 확보할 다각적이며 근본적인 방안을 마련하기 위한 국민적 논의가 절실한 시점에 와있다. 모든 국민에 대한 먹을거리의 안정공급체계를 갖추는 일은, 정부나 생산자 뿐 아니라 식생활의 당사자인 소비자의 올바른 인식과 적극적인 실천을 수반하지 않고는 개선되기 어렵다.

사회 양극화에 따라 한편에서는 기초식량의 확보조차 어려운 소외계층이 있는가 하면 다른 한편에서는 영양과잉과 비만이 급속히 증가하는 현실에서, 국민건강과 영양의 균형 있는 확보를 위한 사회적 노력은 건전한 식생활을 위한 다각적인 정책수단을 통해 추구되지 않으면 안 된다. 생산 및 공급측면에서는 국내생산ㆍ비축ㆍ수입의 적절한 조합을 통한 효율성의 추구가 불가피하지만, 중장기정책의 기본방향은 국내생산 잠재력의 확충에 두어야 하며, 그 핵심내용은 국내가용자원을 최대한 활용하는 자원순환형 농업체계의 구축이어야 한다.

이상의 상황인식을 바탕으로 이하에서는 이명박 정부가 집권 5년 동안 추진해야 할 새로운 농정틀을 담는 청사진을 마련하는 과정에서 고려해야 할 몇 가지 중요과제를 논하고자 한다.

먼저 농식품정책의 기본목표다. 그것은, 국민들이 안심하고 먹을 수 있는 다양한 먹을거리를 안정적으로 공급하며, 경종과 축산을 연계시킨 지속가능한 친환경 농업시스템을 구축하고, 농어촌공간을 전 국민을 위한 쾌적한 공간으로 가꾸어나감으로써 농어업ㆍ농어촌이 지닌 다원적 공익기능을 살려나가는 것이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먹을거리ㆍ농어업ㆍ농어촌 등 세 정책영역을 통합적으로 다룬 ‘국민농정’의 체계가 정립되어야 한다. 이와 관련해서, 지난해의 개정에서 부처간 이해관계를 무원칙하게 봉합하는데 그친 현행 「농업ㆍ농촌 및 식품산업기본법」을 선진국들의 공통된 흐름에 합치하는 「먹을거리ㆍ농어업ㆍ농어촌기본법」으로 전면 개편해야 한다.

이때 식품안전행정 등 부처간의 소관문제는 별개의 문제로 접근하여 정책수요자인 국민의 입장에 선 획기적인 ‘국민농정’의 출발점이 마련되어야 한다. 새 기본법은 단순한 선언적 규정이나 ‘할 수 있다’는 표현의 임의규정이 아니라 ‘해야 한다’는 내용의 구속력을 지닌 강제규정들을 담아, 유명무실한 현행법과는 달리 새로 출발하는 농식품정책분야의 헌법기능을 갖도록 알찬 내용을 담는 것이어야 한다.

둘째, 이와 같이 내실있는 농식품정책의 기본틀을 마련하는 과정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국민적 합의다. 정책집행을 담당하는 실무행정진 중심의 폐쇄적인 입안작업에서 벗어나 경험과 전문성을 지닌 농어업 생산자, 관련사업자, 소비자, 관련분야 전문가들의 폭넓은 참여와 의견수렴을 통한 국민적 합의를 도출해내야 한다. 지난 20년에 걸친 민주화 경험에도 불구하고 ‘농정불신’이라는 말이 아직도 사라지지 않는 가장 중요한 이유는 정책형성과정의 투명성과 개방성이 크게 미흡하기 때문이다.

돌이켜보면, UR 이후 농정의 새 틀을 마련하기 위해 1994년에 6개월간 한시기구로 운영되었던 대통령자문 농어촌발전위원회의 활동을 제외하고는, 김대중 정부의 「농업ㆍ농촌발전계획」(1998년 10월)이나 노무현 정부가 내놓은 현행 「농업ㆍ농촌종합대책」(2004년 2월) 등의 정책형성과정은 행정실무진 주도의 폐쇄적인 성격을 벗어나지 못함으로써 정책대상자를 포함한 국민적 합의가 경시되어 왔던 사실을 부인하기가 어렵다.

특히 식품 및 수산분야가 새로운 정책영역에 포함된 새 정부의 조직개편 이후 새로운 농식품정책의 출범에 대한 국민적 뒷받침을 확보하기 위해서도 기본 정책틀의 입안과정에 다양한 정책대상자들의 여과 없는 목소리를 담아내는 과정이 절실히 요청되고 있다. 여기서 유의할 점은, 의견수렴 내지 심의기구의 구성ㆍ운영이 기득권 보호 차원의 주장을 넘어 농정선진화를 위한 우리 사회의 양식과 지혜를 모을 수 있도록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셋째, 새로 정립될 농식품정책의 중장기 목표는, 한ㆍ미FTA를 뒤이을 EUㆍ중국ㆍ일본 등 거대경제권과의 양자간ㆍ지역간 시장개방협상, 최근의 DDA합의 실패에도 불구하고 큰 틀이 가시화되고 있는 WTO체제하의 다자간 통상교섭의 움직임, 2015년에 예정된 쌀관세화 등 전면개방시대에 차질 없이 대응해나갈 로드맵의 수립과 일관성 있는 실천에 초점이 맞추어져야 한다. 세계농업질서 변화의 거대한 조류에 효율적으로 대응하기 위해서는 정부당국이나 생산자단체의 노력만으로는 역부족이다.

다양한 관련 당사자들의 심도 있는 고뇌와 성찰을 바탕으로 전면개방시대에 살아남기 위한 농어업 및 식품산업의 체질강화전략의 수립이 요구된다. 특정부문의 집단이기주의나 기득권 주장을 넘은 대승적 입장에서 생산자, 소비자 및 관련사업자들이 함께 윈-윈(win-win)하는 상생의 길을 찾기 위한 공동체 차원의 지혜를 모아가야 할 것이다.

바야흐로 새 정부 출범 반년을 눈앞에 두고 새로 출발하는 이명박 정부 2기 농정은 기로에 서있다. 2004년 「농업ㆍ농촌종합대책」이라는 낡은 해도와 나침반에 의존한 비생산적 항해를 계속할 것인지, 아니면 최근의 여건변화를 반영하고 적극적 의지를 담은 새로운 청사진을 가지고 임기 5년의 농정을 추진함으로써 전면개방시대에 농식품산업의 체질강화를 이룩해 나갈 것인지 선택의 시점에 서있다. 그 선택은, 이명박 정부 농정의 정체성 확립과 직결되는 문제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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